방희 (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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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방희는 후한 말 하남윤 출신의 인물로, 유언의 부하로 익주 자리를 거쳐 의랑을 지냈다. 유언 사후 유장의 신임을 얻어 파서 태수로 임명되어 장로를 방비했으나, 유장과의 불화로 위기를 겪었다. 유비가 익주를 점령한 후 좌장군 휘하 사마가 되었으며, 유비가 한중왕으로 추대될 때 영사마로 이름을 올렸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방의로 등장하며, 유비에게 임명받는 모습이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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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희 (후한)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이름 | 방희 |
본명 | 龐羲 (Páng Xī) |
출생지 | 사례(司隷) 하남윤(河南尹) 뤄양(洛陽) |
사망 | 몰년 미상 |
배우자 | 미상 |
자녀 | 딸 1명 (유순의 아내이자 유장의 며느리) |
관직 정보 | |
소속 세력 | 유언(劉焉) → 유장(劉璋) → 유비(劉備) |
초기 관직 (유언 휘하) | 의랑(議郎) |
주요 관직 (유장 휘하) | 파서태수(巴西太守) |
유비 휘하 관직 | 영사마(營司馬) |
2. 생애
방희는 하남윤 하남현 출신으로, 현재의 뤄양 지역이다. 그는 유언의 부하로 경력을 시작하여 익주(현재의 쓰촨성과 충칭)에서 의랑(議郎)을 지냈다.
194년 4월, 유언의 아들 유범(劉范)과 유탄(劉誕)은 군벌 마등과 동맹을 맺고, 이각과 곽사에게 군사 작전을 시작했으나 패배하여 모두 사망했다. 당시 방희는 유언의 친구였기에, 그의 친구 네트워크를 통해 유범과 유탄의 가족을 장안에서 탈출시켜 익주로 안전하게 데려와 유언의 후손을 보존했다.
194년 유언이 사망한 후, 그의 막내 아들 유장이 익주를 물려받았다. 유장은 방희를 파서군(현재의 랑중) 태수(太守)로 임명하고 한중의 장로를 공격하게 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유장은 방희를 파서군에 그대로 두어 장로의 진격을 방어하게 했다. 또한 유장은 그의 맏아들 유순(劉循)과 방희의 딸을 결혼시켰다.[1]
시간이 지나면서 방희는 유장이 자신에게 큰 은혜를 빚졌다고 생각하여 오만해졌다. 결국 유장은 방희를 불신하고 멀리하기 시작했다.
214년, 유비가 익주를 장악한 후, 방희를 좌장군(左將軍) 휘하의 사마(司馬)로 임명했다. 방희는 유비에게 유장이 형주로 이주할 때 유장의 맏아들 유순을 익주에 남도록 허락할 것을 조언했다.
2. 1. 유언, 유장과의 관계
유언 가문과 방희 가문은 서로 친했다. 194년(흥평 원년), 익주목 유언이 정서장군(征西將軍) 마등을 도와 이각·곽사·번조 정권을 몰아내려다 실패해 장안에 있던 아들 유범(劉範)과 유탄(劉誕)이 사망하였다. 의랑(議郞) 방희가 유범, 유탄, 유장의 아들들을 데리고 촉으로 들어갔다. 이 해에 유언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 세상을 떠나고 유장이 뒤를 이었다. 방희는 유장으로부터 후한 대우를 받았다.[2]한중군에 있던 장로가 유장으로부터 이탈하였다. 유장은 그 모친과 동생을 죽이고 화덕중랑장(和德中郞將) 방희를 시켜 공격하게 했지만 누차 패배하였다. 장로의 부곡(部曲, 사병)이 파 땅에 많았으므로 방희가 파군태수에 임명되어 낭중현(閬中縣)에서 장로를 방비하였다. 병력 확충이 필요하다고 보아 한창현(漢昌縣)의 종민(賨民)들을 모으는 등 군세를 키웠는데, 누군가 이를 유장에게 참언하면서 그 사이가 나빠졌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방희는 유장이 장안에서 그의 형제 가족을 구한 것에 대한 큰 호의를 빚지고 있다고 믿었고, 유장이 그를 깊이 신뢰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점점 더 오만해졌다. 결국 유장은 점차 방희를 불신하게 되었고 그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211년경, 유장의 고문 장송이 유장에게 장로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유비를 익주로 초청하라고 설득하면서, 방희가 몰래 유장을 전복하려는 의도를 품고 있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건안 16년(211년), 장송은 유비를 익주로 초청할 목적으로 유장에게 "방희·이이는 자신의 군공을 뽐내며, 외부와 손을 잡으려 하고 있습니다"라고 진언했지만, 장송이 실제로 이러한 참언을 했는지는 불분명하다.
2. 2. 정기(程祁)와의 갈등
201년(건안 6년), 조위가 난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해 목숨을 잃었다. 방희는 한창 현령 정기에게 아들 정욱(程郁)을 보내 병사를 더 요구하였다. 정기는 "군에서 부곡을 모집한 것은 반란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아무리 모함을 받았더라도 성심을 다해야 합니다. 딴마음을 품으셨다면 듣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한편 정욱에게는 "나는 주목의 은혜를 입어 충절을 다해야 한다. 너는 태수의 관리로서 최선을 다하거라. 불의지사(不義之事)는 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하였다. 방희가 다시 사자를 보내 '태수에게 복종하지 않는다면 가정에 화가 미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정기는 "옛날에 악양(樂羊)은 자식을 먹었는데 부자의 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대의 때문에 그랬습니다. 제 아들을 끓인 국일지라도 마시겠습니다."라고 답하였다. 이에 방희는 유장에게 사죄하였다.[3]방희가 장로에게 대항하기 위해 사병을 모집했는데, 유장을 참소하는 자가 있어서 유장은 방희를 시기하게 되었다. 이를 두려워한 방희는 한창 현장 정기에게 구원을 요청하기 위해 아들 정욱을 파견했지만, 정기는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았다면, 성의를 다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응하지 않았다. 방희는 정욱을 죽이겠다고 협박하며, 어떻게든 정기에게 협력하게 하려 했지만, 거듭 거절당했다. 이 때문에, 마침내 방희가 유장에게 사죄하자, 유장도 이를 용서했다.
2. 3. 유비(劉備)의 입촉(入蜀)과 이후
214년, 유비가 익주를 정복하면서 좌장군사마(左將軍司馬)가 되어 유비를 따랐다.[4] 이때 유비에게 형주로 쫓겨난 유장의 큰아들이자 자신의 사위인 유순을 익주에 남기라고 조언하였다. 유순은 촉에 남아 봉거중랑장(奉車中郞將)을 지냈다. 219년, 여러 신하들이 유비를 한중왕으로 추대하고 헌제에게 올리는 표에 방희도 이름을 올렸다.[5]3. 《삼국지연의》에서의 방희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판본에 따라 방의(龐義)로 잘못 기록된 경우가 있으며 등장 분량은 얼마 없다. 제59회, 장로는 동관 전투에서 서량 세력을 박살 낸 조조에 대비해 남하 준비를 한다. 파서태수 방희가 이를 유장에게 급보한다. 제65회, 익주를 손에 넣은 유비의 임용 및 포상 명단에 방희는 영중사마(營中司馬)를 받았다고 언급되는 것이 끝이다.[1]
4. 가계
- 사위 : 유순[1]
참조
[1]
서적
Sanguozhi
[2]
서적
영웅기
[3]
서적
화양국지
[4]
서적
삼국지
[5]
서적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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